포기가 아닌, 나를 위한 존중

읽는 시간 : 3분

사랑하는 딸에게.
근 5개월 만에 편지를 남기는구나.
아빠가 올해 상반기는 정말 많은 일들이 있었단다.

내부적으로는 너를 사랑하시는 외할머니가 아프셔서 엄마가 많이 힘들어 했어. 지금은 회복 중이시지만, 병 발견 초반에는 정말 눈앞이 캄캄했지. 아빠는 집의 균형을 잘 유지하기 위해서 많이 노력했단다.

이런 상황에서 회사에서는 아빠가 거의 반년간 프로젝트에 투입되어서 일하느라 무척 바빴어. 오늘은 이 업무에서 얻게 된 것들에 대해서 이야기해보려고 해.

새로운 장소, 처음 겪는 업무

앞서 말한 것과 같이 심리적으로 불안정한 상태에서, 아빠는 프로젝트로 인해서 새로운 업무 장소로 파견을 갔어. 업무 내용도 지난 8년간 해오던 일과는 전혀 다른 일이었지.

아빠는 혼자 일하는 걸 선호해. 계획을 세우고 빠르게 실행하는 걸 좋아하고, 업무 외적인 이유로 일이 늘어지는 걸 답답해하지.

그런데 이번에 맡게 된 업무는 상당히 많은 사람을 만나야 하고, 그들과 조율하면서 일을 해야 하는 게 핵심이었어. 아빠 성향에 안 맞는 데다 경험도 부족했고, 여러 사람과 부딪히며 일하다 보니 자연스럽게 일이 더뎌지더구나.

그래도 아빠는 내가 가진 장점을 십분 활용해서 일을 해보고자 했어. 평소 읽었던 커뮤니케이션 관련 책의 내용도 도움이 되더구나. 진정성 있게 사람을 대하고, 그들의 감정을 헤아리며, 길을 잃을 것 같을 때는 원래의 목표를 상기하는 것, 그리고 그 구조를 잘 짜서 해결안을 모색하기.

슬슬 보이는 한계, 그리고 지침

하지만 이 업무를 하는 와중에, 프로젝트 리더도 상부에서의 끊임없는 업무 할당으로 인해 스트레스를 많이 받은 상태였어. 이는 자연스럽게 업무 스택의 누적과 갈등 상황으로 이어졌어. 이런 상황에서 내가 맡은 일이 (겉에서 보면 쉬운 것일지 모르겠지만) 진행 상태가 더디니 답답하셨을 거야.

반대로 아빠 입장에서는 촉박한 시간과 불충분한 맥락 속에서 결과물에 대한 기대는 이미 정해져 있어 난처한 상황이었어. 어느 정도 수준까지는 빨리 구축하길 원하는 리더의 입장도 이해가 됐기에, 아빠도 개인적으로 상당히 감정적으로 지치게 되더구나.

용기를 내어 소신을 전달하다

그래서 아빠는 깊은 생각 끝에 다음과 같이 전했어.

“진지하게 생각해봤는데, 앞으로는 다른 적합한 경험 있는 분이 일을 해나가는 게 맞다고 생각합니다. 제가 맡은 부분에 대해서 기초 공사를 잘해야 한다고 생각해서 좀 신중하게 일하다 보니, 원하시는 부분을 충족 못 시킨 것 같습니다. 구조를 잡아놓은 걸 포기하는 게 아쉽긴 한데, 프로젝트 내 다른 업무를 맡고 싶습니다.”

사실 이 말을 하기 되게 어렵다는 걸 알아. 우리 인간은 상당히 남의 시선을 신경 쓰는 성향을 가지고 있지. 다음과 같은 생각을 그 상황에서 많이들 했을 거야.

“아, 내가 이렇게 포기해서 실패자로 낙인찍히면 어떡하지?”
“처음 맡아서 그랬다. 이제 감 좀 잡은 거 같으니 시간을 조금만 더 달라.”

하지만 아빠는 이렇게 생각을 정리했어. 개인적으로는 저런 생각이 들 수 있지만, 조금 더 큰 차원에서 보면 조직 입장에서는 내가 맡은 일이 늦어질수록 병목이 걸릴 거라는 것. 그리고 설령 좋지 않은 평가를 받더라도 그건 내가 감당할 몫이고, 오히려 일을 더 키우는 것보다는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맡아서 진행해보자고 생각한 거지.

대화 이후에, 아빠는 마음이 많이 편해졌어. 다른 업무를 맡게 되었고, 프로젝트 전반기는 무사히 마무리했단다.

그리고 한 가지 더, 아빠랑 같이 일하던 분이 프로젝트 리더에게 이렇게 이야기했다고 하더라고.

“이 사람이랑 일하는 게 좋기 때문에 같이 하고 싶다. 갑자기 그만두게 된다니 당황스러운데, 일부 부분까지는 계속 같이 하게 해달라.”

아까 말한 “실패자로 보일까봐” 하는 걱정, 그게 이 한마디로 많이 풀렸어. 처음 해보는 일이었지만 내 방식대로 소신 있게 일했던 게 헛되지 않았다는 증거 같았거든. 인정욕구랑은 좀 다른데, 좀 뭉클한 느낌이 들더구나.

이미지 설명
산책과 커피 @voti

전하고 싶은 말

딸아, 살다보면 남의 시선이나 평가 때문에 네가 해야 하는 말이나 행동을 못 할 수 있단다. 이해할 수 없는 일도 해야 할 때가 오지.

맡게 된 일이 생소해도, 아빠처럼 자신만의 강점을 평소에 잘 파악해서 할 수 있는 부분까진 최대한 해보자.

다만, 같이 살아가는 인생이니 타인에게 해가 되지 않는 범위에서 네가 “아니야”라고 말할 수 있는 용기를 가지면 더 유익하게 살 수 있다고 생각해.

그럼에도 잘 안 풀리는 경우에는 이렇게 생각해보자. 계속 이걸 끌고 가는 게 근거 없이 무모한 건지, 아니면 내 고집과 자존심 때문인지, 그것도 아니면 근거 있는 확신이 있는 건지.

그 판단이 서면 다음으로 나아가되, 그 결정만큼은 남을 의식하는 게 아니라 순전히 너를 존중하여 내린 결론이길 바라.

남의 말이나 행동에 신경을 쓰는 대신 자신의 행동이 옳은지 여부를 따지는 사람이 더욱 풍요로운 인생을 살 수 있다.
—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사랑한다,우리 딸
아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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